근대건축 · 1910년 준공
미상
일제강점기 도심형 개량 한옥 주택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민족 시인 이상화가 마지막 숨을 거둔 도심 속 전통 한옥.
- 건축가
- 미상
- 준공
- 1910년
- 양식
- 일제강점기 도심형 개량 한옥 주택
- 주소
-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6-1 길찾기
먼저 알고 갈 이야기
이상화 고택과 서상돈 고택은 원래 이웃한 집이 아니었다. 이상화 고택은 도심 재개발로 철거될 뻔한 것을 시민운동이 지켜냈고, 서상돈 고택은 2008년 원래 자리를 떠나 이상화 고택 바로 옆으로 옮겨 복원되었다.
언제 어떻게 지어졌을까?
이상화 고택은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이상화(1901~1943)가 1939년부터 세상을 떠난 1943년까지 살았던 집으로, 건물 자체는 191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999년 도심개발사업으로 헐릴 처지가 되자 대구 고택보존 시민운동이 시작되었고, 2002년 경북대 교수 이상규를 중심으로 「민족시인 상화 고택 보존위원회」가 꾸려져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였다. 인근에 주상복합아파트를 짓던 군인공제회가 고택을 매입해 2005년 10월 27일 대구시에 기부채납했다. 대구시는 건물을 1940년대 모습으로 보수했고, 시민운동본부가 모은 돈으로 전시물을 갖춰 2008년 8월 12일 개관했다.
서상돈 고택은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1851~1913)의 집이다. 건립 시기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원래 고택 터에는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섰고, 집은 2008년 이상화 고택 바로 옆으로 옮겨 복원되었다.
누가 만들었을까?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알려진 대구 출신 시인으로, 말년을 이 집에서 보냈다. 서상돈은 1907년 담배를 끊어 모은 돈으로 나라가 일본에 진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며, 1901년 이후 계산성당 재건 기금 모금에도 참여했다. 고택 보존에는 이상규 교수 등 시민운동 참여자와 부지 개발 주체였던 군인공제회가 관여했다.
공간 뜯어보기
이상화 고택은 대지 205㎡에 건축면적 64.5㎡인 단층 목조주택 2동으로, 안채와 행랑채로 이루어진다. 행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에 지붕 옆면이 삼각형으로 잘린 맞배지붕이고, 4칸 가운데 1칸이 대문이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금은 시인의 유물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쓰인다. 좁은 도심 필지에 두 채를 붙여 앉힌 소규모 도시 한옥이다.
서상돈 고택은 2003년 조사 당시 안채, 사랑채, 곡간채, 대문채로 이루어진 튼 ㅁ자 배치였고, 대문과 안채·사랑채 사이에 붉은 벽돌 아치형 중문이 있었다. 2020년 현재 안채는 정면 4칸, 사랑채는 정면 3칸의 건물로, 대청마루 앞에 유리문을 달았다. 대구역사문화대전은 두 건물을 전통 한옥이 아닌 도시형 개량 한옥으로 분류한다. 툇마루에 유리문을 달고 하부를 타일로 마감하는 등, 한옥이 근대 재료와 생활 방식을 받아들인 흔적을 볼 수 있다.
알고 보면 더 재밌는 이야기
두 집은 식민지 시기에 저항한 두 방식, 곧 시를 통한 저항과 경제 운동을 통한 저항을 한곳에서 보여준다. 동시에 이 한옥들이 남은 과정은 도심 재개발 속에서 역사 인물의 집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라는 2000년대의 질문과 연결된다. 서상돈 고택처럼 원래 자리를 떠나 옮겨진 집은 건물은 남았지만 원래 필지와의 관계는 사라졌다는 점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동네 속 이 건물의 존재감
두 고택은 계산성당 남쪽, 고층 주상복합건물 바로 아래 골목에 있다. 대구 중구 근대골목 투어 코스에서 동산의료원 선교사주택, 3·1만세운동길, 계산성당 다음에 들르는 지점이다. 주차장이 없어 인근 매일신문사 유료 주차장을 이용하도록 안내된다.
현장에서 꼭 볼 꿀포인트
- 이상화 고택 행랑채의 맞배지붕과 안채의 팔작지붕 옆면 모양을 비교해 본다.
- 서상돈 고택 대청마루 앞에 달린 유리문과 툇마루 아래 마감을 살펴 개량 한옥의 흔적을 찾는다.
- 두 고택 뒤로 솟은 주상복합건물을 함께 올려다보며 고택이 남은 필지의 크기를 가늠해 본다.
- 안채 전시실에서 이상화 시인의 유물과 1999년 이후 보존운동 관련 자료를 확인한다.